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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Zéro absolu : 제로 앱솔루 1






꽃의 도시,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갖가지 문화가 발달한 프랑스 최대 규모의 도시 파리. 그 중심에는 전 세계 레스토랑 순위 1위로 선정된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이 위치해있다. 평범한 프랑스인이 세운 한국의 요리와 프랑스의 요리가 섞인 퓨전 프랑스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그 레스토랑은 한국인 어머니가 어릴 적 자신에게 해주곤 했던 한국 요리를 모티브로 일궈낸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나 현지인에게 다소 생소했던 음식들은 손님들의 발길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그의 가게 주변엔 평이 좋기로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즐비했고 그 중엔 가던 길도 우회해서 다시 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미슐랭 2스타( Michelin Star )를 받아낸 셰프가 있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결국 큰 인기를 얻지 못한 레스토랑이 폐점을 고민하고 있을 때 그 레스토랑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프랑스의 레스토랑들을 돌아다니며 음식들을 평론하는 평론가이자 미식가 B, 그가 내는 평들의 파급력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미슐랭 스타를 부여하는데 참고할 정도로 엄청났으며 그 덕에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신뢰를 얻고 있었고 몇몇 셰프들은 자신의 음식을 평론해달라며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세계 최고의 평론가로 거듭났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B의 평론 단 몇 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레스토랑은 곧 미슐랭 1스타를 따내면서 주변에 있던 고급 레스토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레스토랑을 세운 남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또 다시 문에 닫을 위기에 처한 가게의 새로운 운영자 및 메인 셰프로 등장한 것은 요리에 천부적인재능을 보이기로 유명한 그의 아들이었다. 그렇게 젊은 청년의 손에 쥐어진 레스토랑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Zéro absolu’ 제로 앱솔루, 일명 절대 온도. B의 평의 한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 마치 모든 물체의 운동에너지가 0인 상태, 움직임 하나 없는 세계가 된 것처럼 얼어붙게 하는 절대온도를 방불케 하는 맛이었다.

 

****

 

더스틴, 어서 이것 좀 봐! B가 우리 레스토랑에 다녀간 것 같아.”

 

제로 앱솔루의 직원이 다들 들떠있는 이유는 방금 올라온 B의 새로운 포스트에 있었다. 다가오는 봄에 맞춰 봄을 테마로 한 새로운 메뉴 런칭 때 선보인 메뉴에 관한 평을 남긴 포스트에는 제법 나쁘지 않은 평이 담겨있었다. 필명 B,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많은 이들이 B의 정체를 궁금해 했고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것을 시도했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모두가 B의 평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었다. 경수가 그에 속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의 평을 잘도 믿겠다며 비꼬던 경수의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B의 평에 커다란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고 미슐랭 가이드에서조차 그의 평을 눈여겨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B의 평의 파급력을 근거로 예상해보자면 내일은 아마도 평소보다 더 많이 재료를 공수 해와야할 것이었다. 물량을 더욱 확보해올 것을 지시하려던 찰나, 급하게 더 신선한 재료를 확보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셰프. 경수에게 다가온 직원은 그에게 감히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그의 사전에 한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결과는 경수가 원하는 것 오직 하나여야만 했다. 그 외에 적용되는 다양한 변수가 경수를 가로막기엔 그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가 너무 막대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제시, 뭐든 0순위 위에 있는 것은 없어요. 그리고 우린 지금 전 세계 최고 레스토랑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베이스로 깔고 있고.”

 

직원이 경수의 말에 담겨있는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일 봐요, 제시

 

평범한 내일을 기약하는 말에 내포된 의미 또한.

 

경수 뭐든 이루고자 하는 것은 꼭 이뤄야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요리사보단 CEO에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의 성격이 CEO로서 높은 성과를 얻어내는데 대개 도움이 되는 대표적인 타입 중 하나였고 주변에서 경수를 오래 봐온 김종대나 박찬열, 김준면 말마따나 두뇌회전도 느린 편이 아니었으니. 오늘도 그러했다. 아무리 사장이 인심이 좋아도 제로 앱솔루에만 유통하는 것도 아닌데 가능하겠냐며 코웃음을 치던 김종대는 평소보다 2배에 가까운 물량을 키친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립박수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는 가서 재료 체크 안 해?”

, 그거 내 담당 아니야.”

 

아침부터 우유를 쪽쪽 빨며 재료를 체크하는 경수의 옆에서 자꾸 기웃거리는 종대에게 돌아갈 생각이 없냐는 말을 돌려하는 중이었다.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이는 종대의 대답을 들은 경수는 내쫓기를 포기했다. 너 그거 알아? 먼저 운을 띄운 건 종대였다.

 

뭔지는 몰라도 네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

뭐래, 들어봐. B 알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

“B가 동양인 남자라는 소문이 있어.”

 

같은 동양인으로서 반가움이라도 표출하라는 건가. 경수는 그다지 B에게 흥미가 없었다. 경수는 늘 그가 써낸 평은 아버지의 가게를 도운 것이지 결코 자신을 도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싶어 했다. B의 말 몇 마디가 아버지에게 미슐랭 1스타를 안겨줬지만 그 후로 B는 한참을 제로 앱솔루에 오지 않았다. 그가 다시 경수의 레스토랑에 대한 평을 쓴 것은 경수가 이미 미슐랭 3스타를 따낸 후였다. 주변 사람들은 쓸데없는 자존심이라며 혀를 내둘렀지만 경수는 개의치 않았다. 무엇이든 일말의 자존심도 내줄 수 없었기에.

 

크게 흥미가 없어 보이는 경수의 표정을 본 종대가 됐어, 흥미도 없는 놈한테 내가 뭘 얘기 하냐? 간다. 하며 자신의 베이커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자 차단되었던 밖의 소음이 들려왔다. 자전거가 지나가는 소리, 새들의 소리,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같은 작은 소음들이 파리에 아침이 밝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제로 앱솔루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 오늘도 바쁠 테지만 다들 파이팅입니다.”

 

파리의 명물이 문을 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누구보다 완벽하게.”

 

새로운 아침이 시작이었다.

 

****

 

파리의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들 중 가장 늦게 꺼지는 것을 고르자면 제로 앱솔루의 간판을 꼽을 수 있었다. 가장 이른 시간에 문을 열어 가장 늦은 시간에 문을 닫는 그 바쁜 레스토랑의 문은 먹으면서 즐길 수 있는 일순간의 쾌락을 위해 거리낌 없이 돈을 쓸 수 있는 부호들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위해 가치 있는 최고의 요리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이름 있는 부호들의 입맛은 깐깐하고 취향도 매우 독특해서 잡고자 하는 고객이 일반 서민이 아닌 부자들이라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다. 센스 있게 개인의 기호에 맞춘다는 것은 주문사항에 말하지 않아도 고객을 기억하고 셰프가 맞춰나가는 것이니까. 의류라 치면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제작 정도라 볼 수 있겠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닫고 실천한 경수의 레스토랑에 대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마지막 손님이 빠져나가고 제로 앱솔루의 간판의 불이 꺼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정리를 마친 경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조금 으스스한 편이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었지만 워낙 어둡고 싸한 골목길에 드나들 때면 저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차도 없었다. 아침에 종대의 부탁에 못 이겨 차를 두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날씨가 좋으니 걸어가자는 멍청한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며 걷던 경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익숙한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B, 제발, 한 번만 도와줘.”

그로 인해 내가 얻는 이익은? 위트 있는 대답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럼 생각해보지.”

 

B, 프랑스 전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 이름.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쳐지나가면서 마주친 남자는 무언가 미필적 고의가 다분한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그 남자의 앞에 서있는 동양인 남자. 경수는 어쩌면 그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 B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의 평 한마디면 돼. 제발 날 좀 도와줘.”

 

그리고 그 짧은 생각은 곧 확신으로 들어찼다.

 

****

 

프랑스에서 꽤 이름을 떨쳤던 레스토랑이 뒤집어졌다. 떨쳤던, 현재는 아니란 뜻이다. 아버지의 레스토랑을 급하게 물려받은 아들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최근 하향세를 보이고 있었고 급격하게 저하된 음식의 수준에 다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B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요리사로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수치스러운 말들이 포스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서 레스토랑에 발길이 끊기는 것은 당연했다.

 

더스틴, B가 동양인 남자라는 소문이 있던데.”

 

일전에 종대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경수는 지금 어처구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를 후회 중이었다. 동양인 남자, 관심 없는 얼굴을 하면서도 어제 봤던 동양인 남자를 떠올리고 있을 때 경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한 남자였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읽고 있는 옆모습이 가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본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리라 경수는 확신했다. 날렵한 턱선과 메뉴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똑한 콧대, 침착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따라 자리한 짙은 눈동자. 그 남자가 메뉴판을 내려놓았을 때 경수는 작게 이름을 읊었다.

 

“B.”

 

경수의 주문을 받아낸 웨이터가 키친으로 들어왔다. 필레미뇽, 미디움이요. 웨이터의 목소리를 들은 보조 셰프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내가 할게. 경수의 목소리가 분주한 키친에 울렸다. 다급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춘 보조 셰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곤 곧 다음 주문을 확인하고 요리에 몰두했다. 조심스럽게 또 심혈을 기울여 요리했다. 굳이 평론가인 B에게 좋은 평을 받아내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유는 경수도 알 수 없었다. 얼굴을 본 것이라곤 그 골목에서 짧은 시간 옆모습을 스치듯 보았을 뿐이었고 오늘 이 자리에서가 딱 두 번째였다. 조심스럽게 플레이팅까지 마친 경수의 요리를 가져가려는 웨이터의 손을 거절한 경수는 직접 요리를 들고 B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로 향하기 전 서비스로 내올 산페르도, 1865 리제르바 까베르네 소비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레미뇽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와인은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메인셰프가 직접 추천하는 와인입니다. 오늘 같은 야경을 그냥 즐기기엔 아깝잖아요.”

메인셰프께서 센스가 뛰어나시네요. 와인도 골라주시고.”

“.....”

직접 서빙까지 와주시고.”

 

얼굴도 굉장히 미인이시네. 눈도 즐겁고 입도 즐겁고. 활짝 웃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경수의 얼굴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명물인 레스토랑의 메인셰프의 얼굴이니 각종 언론이나 매체 등을 통해 알려지고도 남았을 것이었고 실제로도 외출을 할 때면 알아보는 이들이 종종 말을 걸어오곤 했으니. 그런데 왠지 그가 경수를 알아보았을 때 경수는 문득 그것이 단순히 알아봤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꼭 경수가 B의 존재를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B, 그쪽한테 굳이 점수를 따기 위함은 아니니 오해는 없었으면 하네요.”

참고 할게요. 근데,”

“.....”

내가 점수 따기 싫은 얼굴은 아닐 텐데, 흔한 얼굴은 아니잖아?”


B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해했고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몰라도 어처구니없는 말을 잘도 하는 것이 당황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양인 얼굴이 흔한 얼굴은 아니죠, 여긴 프랑스니까.”

 

바깥에서는 에펠탑 불꽃축제가 시작되었다. 폭죽소리를 내며 터지는 불꽃들이 절경이 따로 없었다. 화려한 불꽃들이 빛을 보였다 사라지기를 수십 번. 통유리 너머로 비치는 둘의 모습의 뒤로 또 한 번의 불꽃이 튀었다. , 또 다른 불꽃이 터졌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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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연재텀이 조금 느려질 것 같아요ㅠㅠ 그래도 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도 잘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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