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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봄비

                                             

       

[백도] 봄비

W. BETH 베스


나 결혼해

“......”

 

수화기를 들고 있는 백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백현아 듣고 있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백현에게 물어오는 경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백현은 그래도 말이 없었다.

 

결혼 축하해, 경수야

 

애써 담담한 척 내뱉는 백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축하해줘서 고맙다며 한없이 밝게 웃는 소리가 백현의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찔러댔다. 내 행복을 꿈꾸고자 상대의 행복을 깰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하고 또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구속과 피차 다를 게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백현이었다. 애써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내며 경수의 말들을, 목소리를, 행복을 노래하는 웃음소리를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려 백현은 노력했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을 때 백현은 자리에 주저앉아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빌어먹을 짝사랑의 끝이었다. 백현에게 경수란 곧 전부였다. 눈을 감으면 캄캄한 어둠이 보였고 그 어둠에 쫓겨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면 백현은 언제나 경수와의 첫만남을 기억했다. 그 따뜻하고 눈이 부셨던 봄날 누구보다 수려했던 너의 모습을 처음 마주한 그 날을.

 

****

 

때늦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봄날이었다. 하필이면 늘 확인하던 일기예보를 확인 하지 못하고 온 탓에 내리는 비를 몽땅 다 맞을 것 같아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질척한 운동장을 빠르게 뛰어가던 순간 누군가 백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드리워진 주황색 우산에 백현은 고개를 들어 우산의 주인을 확인했다.

 

비 맞으면 감기 걸려. 같이 쓰고 가

 

같은 반 도경수였다. 평소에 눈에 띄지 않아서 말도 몇 번 주고받지 않았는데 대뜸 가던 사람 붙잡고 우산을 씌우는 모양새가 좀 이상했지만 가는 길이 같아 함께 동행 하기로 했다. 가면서 주고받았던 이야기는 몇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계절, 자주 하는 게임, 관심 있는 분야. 대체적으로 처음 학교에 들어오면 친구들끼리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던지는 사소한 질문들이었다. 초여름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백현의 질문에 경수는 꼬박꼬박 묵묵히 답을 해주었다. 어느덧 도착한 집 앞, 백현은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 젖은 교복을 갈아입고 머리를 탈탈 털며 라디오를 켰다.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던 터라 라디오를 틀어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가만히 듣곤 했다. 그 중 아는 노래는 따라서 부르기도 했고 좋은 노래는 제목을 기억해두고 찾아서 듣기도 했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노래가 방안을 울렸고 백현은 문득 경수가 떠오른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정말 문득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경수의 얼굴이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아른거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멋대로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백현은 그렇게 새벽을 꼬박 누워 생각을 하다 결국 2시간도 채 못자고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교실 문을 쉽사리 열 수가 없었다. 열면 그 안에 경수가 있을 거고 경수는 어제를 생각하며 백현에게 환히 웃으며 인사를 할 것이고 백현은 정말 경수가 그랬다간 심장이 펑 터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큰 결심을 하고 크게 숨을 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내심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경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렇게 아침자습시간을 보내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백현은 단 한 번도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자꾸 경수의 빈자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결국 교무실에 찾아가 담임 선생님께 경수의 결석에 대해 물었고, 병결이라는 답을 듣는 순간 백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혹시 큰 병은 아닐까,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걸까, 학교에 오지 못할 만큼 아픈 걸까. 다른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경수의 집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경수의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초인종을 눌러댔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경수를 찾았다.

 

도경수!!! !!! 문 좀 열어봐!!!”

 

그렇게 두어번 반복을 하자 누군가 안에서 문을 열었고 그 누군가는 바로 경수였다. 창백한 얼굴, 이마에 맺힌 식은땀, 차가운 몸, 그야말로 정말 매가리 없는 모습을 한 경수가 눈앞에 있었다.

 

변백현...?”

 

백현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당장 경수를 세게 끌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나 몸은 머리보다 빨랐다.

 

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왜 갑자기 사람을 끌어안고 그래.”

나보고 감기 걸린다고 우산 씌워주던 사람이 누군데 여기서 이렇게 골골대고 있냐?”

그냥 어쩌다보니...”

누가 멋대로 아프래.”

 

설마 그거 걱정돼서 찾아온거냐? 별로 심한 것도 아닌데. 땀 좀 봐. 경수는 소매로 백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보들보들한 소매의 느낌이 좋았다. 축축하고 습한 날씨와 다르게 참 뽀송한 것이 자꾸만 어루만지고 싶었다.

 

이제 가볼게. 너 쉬어야지.”

뭐야 이렇게 금방 갈거면 뭐하러 이렇게 급히 뛰어왔어?”

갈게. 푹 쉬어라.”

 

아마 평생 모르겠지. 왜 뛰어왔는지, 무엇이 이렇게 백현을 바삐 뛰어오도록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도경수라는 것도. 백현이 말하지 않으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끝날 사랑이었다. 누군가 짝사랑은 지독히도 아프고 시린 것이라고 했다. 몇 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것이 짝사랑 그리고 첫사랑이라고 했다. 지금 백현에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상대는 경수였다. 굳이 이유를 따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경수만 보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는 심장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부디 아프지 않은 사랑이 되길 바랐다. 또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프지 않게 고르고 바르게 자란 자신의 사랑니처럼.

 

****

 

고등학교 3년을 내내 백현은 경수와 함께 보내왔다. 그간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오고 지켜봐오고 의지했다. 경수의 다양한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봐오는 것은 꽤나 기쁘고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다른 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털어놓을 땐 알 수 없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또 경수의 감정에 공감했다. 작고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까지.

 

그리고 대학에 갔다. 평소 바라던 꿈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경수의 모습 그리고 그걸 지켜보며 또 좋아했던 백현의 모습. 시간이 흘러 한층 더 성장했지만 경수와 백현의 관계는 아직 그 자리에서 머무를 뿐이었다.

 

각자 다른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바쁜 일정 탓에 서로 연락이 조금씩 뜸해질 쯤 먼저 연락을 해온 건 다름 아닌 경수였다.

 

[ 잘 지내? 바빠서 그런지 서로 연락을 자주 못해서 아쉽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만나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나서 못 그랬어. 혹시 수요일 저녁 8시쯤에 시간 괜찮아? 만나서 술이나 할래? 너 괜찮으면 그 때 보자. ]

 

짧고 형식적인 문자였다. 서로간의 안부를 물을 때 종종 저런 식의 문자가 오가곤 하지. 하지만 그런 것은 백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경수에게 오지 않았던 연락이 왔다는 것. 또 경수가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백현의 마음을 움직일 뿐이었다.

 

경수와 백현이 만난 장소는 그다지 거창한 공간이 아니었다. 집 앞 포장마차. 그럼에도 좋았다. 뭐든 함께 있으면 다 좋았다. 아직까지 몇 년이 지나도록 접지 못한 짝사랑도 그로인해 겪었던 크고 작은 마음 고생도 경수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뭐든 다 견딜 수 있었다. 경수는 백현이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곧 전부였다.

 

그 만남을 끝으로 경수와 백현은 대학을 졸업했다. 더 큰 사회로 나아가 취직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전엔 겪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겪기도 했다. 더 큰 사회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일 때마다 백현은 줄곧 경수를 생각해왔다. 이럴 때 옆에 경수가 있었더라면. 네가 있었더라면. 그러면 조금 덜 힘들었을 것 같아서. 그랬을까 싶어서.

 

하지만 그 길고 긴 기다림도 언젠간 끝이 있는 법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끊어버리면 그게 바로 끝이었다. 백현에게 끝을 알린 것은 바로 경수의 결혼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끝을 본 백현은 한참을 울었다. 생각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말하기 전 까지는 죽어도 모르겠지. 그리고 언젠간 그 끝이 있겠지. 내가 접어야만 할 때가 오겠지 하는 생각들. 몇 번을 다짐하고 마음 먹었지만 연습과 실전은 달랐다. 늘 그랬듯이 실전은 더욱 더 힘들었고 많은 고통을 요했다.

 

몇 년을 품에 안았고 몇 번을 품에서 덜기를 노력했지만 깊이 자리 잡은 너는 조금도 내게서 덜어지지 않았다. 덜어지려하면 다시 내 마음 속에 차올랐고 다시 또 덜어지려하면 차분했던 내 마음을 멋대로 흐뜨려 놓았다. 너는 단 한시도 내게 쉬웠던 적이 없었다. 너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또 사랑하고 느꼈던 그 수많은 시간들 중 단 한시도.

 

****

 

결혼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경수의 얼굴을 보면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리며 모든 사실을 다 말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경수의 행복을 망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래서 가지 못했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백현의 1순위는 단연 경수의 행복이었고 지금 이 순간 백현에게는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것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복잡하고 아픈 백현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때늦은 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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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전력으로 올리기 전 먼저 며칠 공개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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