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그림자가 되어 - [백도] A-ONE 2

[백도] A-ONE 2


[백도] A-ONE 2


W. BETH 베스



뉴욕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분주했다. 바쁜 출근길, 직장인들과 학생들의 빠른 발걸음, 이런저런 소음들이 뉴욕의 바쁜 아침을 보여주고 있었다. 피곤함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어버린 경수가 커튼 사이로 비치는 간지러운 햇살에 눈을 떴다. 피곤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찬물로 세수를 마친 경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단정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후 캐리어에 몇 안 되는 짐을 싸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니 방금 샤워를 마친 건지 샤워가운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뉴스페이퍼를 읽고 있는 백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큼큼 거리며 자신이 내려왔음을 알린 경수에 백현은 뉴스페이퍼에 고정했던 시선을 경수에게로 옮겼다.

 

피곤해보여서 오후 내내 퍼질러 잘 줄 알았는데, 그렇게 게으른 성격은 아닌가봐?”

일찍 한국 본사로 가야해서요.”

난 온몸이 이렇게 뻐근한데 집주인보다 더 편하게 잔 것 같아 보이는군.”

찜질팩이라도 드릴까요?”

가이드의 임무가 뭐지?”

“......”

 

미간을 찌푸린 경수가 입술을 짓씹으며 백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백현의 손에 들려진 뉴스페이퍼를 뺏어 소파 위에 올려둔 후 백현의 손을 맞잡았다. 경수의 가이딩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에너지가 빠르고 정확하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백현은 느낄 수 있었다. 짧은 가이딩이 끝나고 뒤돌아 가려는 경수를 다시 붙잡은 것은 백현이었다.

 

전 세계 랭킹 원탑인 센티넬의 가이드가 이렇게 실력이 형편없어도 되는 건가?”

“... 그렇다면 하는 수 없죠. 가이드 다시 뽑으셔야겠네요.”

 

 

경수는 백현의 저런 심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 꼭 저렇게 삐딱선을 타며 시비를 걸곤 하는 백현에게 정감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현이 다시 저를 붙잡을까 빠르게 저택을 빠져나온 경수는 그제야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

 

14시간 비행에 지칠 법도 했지만 경수는 피곤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도착한 당일 휴식 한 번 않고 본부까지 와서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복잡하고 힘든 절차를 밟은 보고가 끝나자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오는 듯 뻐근한 뒷목을 잡고 작은 하품을 하던 경수는 문득 자신의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별난 놈 중 특히도 별난 자신의 오너가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피곤함을 부추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그렇게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는 데 희열을 느끼고 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백현이 처음이었고 그런 백현의 모습은 늘 경수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주변의 가이드들은 착하고 잘 맞는 가이드들을 만나 잘 살고 있었고 가이딩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었다. 그러다 간혹 서로 눈이 맞아 사랑을 이뤄내기도 했었다. 그런 모습들이 마냥 부럽다고 느낄 때면 주변에서는 너도 언젠간 꼭 그럴 날이 올 거라며 응원의 말들을 보내왔고 경수 또한 그럴 거라고 믿으며 자신의 오너를 기다리고 있던 평범한 가이드들 중 하나였다.

 

그런 경수의 환상을 처참히 깨고 오랜 기다림 끝에 온 것은 지금의 오너, 백현이었다. 생각만 해도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자신의 오너를 만나고자 경수는 또 다시 그 고된 14시간의 비행을 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아프게 쿡쿡 쑤셔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차에 올라탄 경수에게 운전기사는 아스피린을 건네주었다.

 

음악 좀 틀어주시겠어요?”

선호하는 장르 있으세요?”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적당히 신나고 자극적인 팝송이 흘러나왔고 음악에서 흘러나오는 팝가수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경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다들 바쁘게 살아오고 있음을 증명하듯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뉴욕과 다름이 없었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는 경수 또한 그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고 지금도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

 

생각보다 빠르게 끝난 입국심사에 경수는 남은 시간 동안 공항에 조용히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여러 가지 소식들, 메일이나 문자 혹은 전화 등을 통해 바쁘게 오고가는 업무들, 그리고 몇 안 되지만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온 간단한 메시지들까지. 한 동안 만지지 않은 휴대폰에는 밀린 알림들이 알림창에 쫙 깔려있었고 알림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경수의 고개가 돌아간 것은 사람들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둔탁하게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더욱 커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설마 하며 빠르게 뛰어간 그 장소에는 폭주한 센티넬이 주변에 있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다 뽑아다 땅에 꽂아놓고 있었다. 이 난장판 속에서 가이드가 왜 나서서 막지 않고 있나 하며 서둘러 다가간 경수는 아차 싶었다. 전 세계 센티넬 랭킹 3위에 해당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센티넬, 오세훈이었다. 상위 클래스의 센티넬에게는 일반 가이드들이 섣불리 다가가 가이딩을 할 수 없다.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더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순수혈통의 센티넬인 오세훈에게는 순수혈통 가이드만이 가이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순수혈통의 가이드인 경수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센티넬 중 원탑을 오너로 두고 있으니 호흡이 어느 정도 맞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 경수의 판단이었고 그렇지 않다 해도 폭주한 센티넬을 앞에 두고 그런 걱정과 판단들은 다 쓸모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있는 대로 다 땅에 꽂아놓으셨네요. 얼굴도 잘 알려지신 분께서.”

뭐야?”

가이딩 받읍시다. 금방이면 되니까 손 좀 주세요.”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지금 막 가이딩 하려는.”

제 오너는 미국 전역, 아니 전 세계를 대표하는 센티넬 원탑 벡입니다. 이 정도 경력이면 이제 좀 믿음이 가세요?”

“.....”

 

오세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팔을 들어 손을 맞잡았다. 경수가 가이딩을 시작하자 세훈의 눈을 물들였던 빨간 기운들은 점점 사라지고 본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폭주를 멈추고 제 모습을 찾아간 세훈의 모습은 그저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손을 떼어낸 경수가 세훈과 눈을 맞췄다.

 

생각보다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유유히 그 장소를 빠져나온 경수는 제 손목에 걸쳐져 있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 시간이 막 다가오고 있었다. 지정된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는 경수의 눈에는 많은 감정들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여러 감정들이 도화지에 선을 그리듯, 그렇게. 하지만 고요한 눈에 몰아친 거대한 감정의 요동에도 경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늘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어딘지 경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현의 옆. 그것이 바로 경수의 자리였다.

 

****

 

혼자서 공항에 남게 된 세훈은 바삐 걸음을 움직이는 경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각인을 한 가이드가 없는 센티넬이 까다로운 조건들을 제치고 자신과 맞는 가이드를 찾았다고 할 때 드는 감정은 딱 한 가지. 정복감 이었다. 세훈이 지금 딱 그랬다. 경수에 대한 정복감. 하지만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세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놈이면 좀 빼보려고 했더니만 변백현 가이드라.”

변백현이 설마 이중각인을 시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낮게 깔린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찬열이었다. 그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린 세훈이 고개를 휙 돌려보자 반가운 표정일 줄 알았더니 웬 반항하는 사춘기 고딩의 뉘앙스를 풍기네 하며 세훈에게 다가오는 찬열이 보였다. 변백현이 원탑이라면 찬열은 그 다음이었다. 미국에서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백현 다음으로 미국을 빛내는 센티넬이 한국에 자리한 이유가 궁금했던 세훈이 여긴 왜 왔어요? 라며 묻자 내 고향에 맘대로 오는 것도 안 되냐 인마 하며 세훈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는 것이었다. 아프다며 이마를 만지작거리던 세훈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아까 그거 다 봤어요?”

여기부터 저기까지 있는 거 다 뽑아다 땅에 그대로 꽂아버리는 거?”

고향에 온 기념으로 뼈를 묻고 가시려고 이러시는 거죠 지금?”

설마. 근데 너 아까 그 가이드 정말 변백현이 이중각인 시켜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 아니에요. 그거 자기 오너가 벡이라고 할 때부터 포기했어요.”

그래도 너무 포기는 마라. 한국 본부에서 너랑 맞는 가이드를 찾았다는데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걸?”

 

도대체 변백현 편이에요, 제 편이에요? 하고 묻는 세훈을 향해 나야 늘 더 간절한 사람의 편이지 라며 윙크를 날리고 가는 찬열을 무시해버린 세훈은 서운하다며 난리를 치는 찬열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본부로 가요.”

 

거무스름하게 코틴 된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답답했다. 나무가 녹빛을 띠지 못하고 하늘이 푸른빛을 띠지 못한 채 사람들의 소리가 차단되어 들리지 않는 풍경들은 생명이 없는 도시들 같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내린 창문으로 인해 생긴 비좁은 틈. 그 작은 틈을 향해 쨍하게 내리는 햇빛이 세훈의 눈을 부시게 했고 싱그러운 봄내음은 코를 간질였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하늘 위를 가르는 비행기에 세훈은 고개를 들어 비행기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저 안에 그 가이드가 타고 있겠지 하며 생각을 하던 세훈은 부질없는 생각이라며 창문을 올렸다. 바깥에서의 소음으로 잠시나마 시끌벅적했던 차안에는 다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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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셨죠ㅠ^ㅠ 학업에 치여 딜런과 벡이 살고있는 뉴욕처럼 분주한 삶을 살다가 주말의 힘을 빌려 이렇게 2편을 업로드 했습니다. 드디어 세훈이가 나왔고 텐이 누구인지도 나왔죠. 이번편도 모쪼록 잘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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